분명 SF 영화라고 들었는데, 틀어놓고 10분이 지나도록 뭘 보고 있는지 감을 잡지 못했습니다. 우주선도 없고, 액션도 없었습니다. 그냥 한 여자가 낡은 밴을 몰며 스코틀랜드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들이 이상하리만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Under the Skin》은 그런 영화입니다.
스칼릿 조핸슨, 감정 없이 인간을 연기하다
제가 이 영화를 보기 전에 기대했던 건 솔직히 말하면 스칼릿 조핸슨의 화려한 액션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접해보니 전혀 다른 방향의 연기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연기하는 존재는 인간 여성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감정이 없습니다. 눈빛에 온도가 없고, 미소도 기계적입니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섬뜩하게 느껴졌습니다.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이른바 비언어적 연기(non-verbal performance)의 비중이었습니다. 비언어적 연기란 대사 없이 표정, 시선, 몸짓만으로 감정과 상태를 전달하는 연기 방식입니다. 스칼릿 조핸슨은 이 영화에서 대사보다 침묵으로 더 많은 것을 말합니다.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후반부 장면은 제가 본 영화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오래 남는 장면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촬영 방식 자체도 남달랐습니다. 캔디드 카메라(candid camera) 기법을 대폭 활용했는데, 이는 피사체가 촬영 중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자연스러운 반응을 포착하는 방식입니다. 스코틀랜드 거리에서 일반 시민들을 상대로 몰래 촬영한 장면들이 실제 영화에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이 때문에 영화 속 현실감은 일반적인 픽션과 다른 질감을 가집니다. 제가 직접 보고 느낀 건데, 그 장면들은 뭔가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이질감과 사실감이 동시에 있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스칼릿 조핸슨의 연기를 보려는 분들께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감정 연기"를 기대하시면 안 됩니다. 이 영화에서 조핸슨의 연기가 뛰어난 이유는 감정을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관객이 그 내면의 변화를 느끼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아트하우스 SF가 보여주는 낯선 인간 연구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든 생각은 "이건 SF 영화가 아니라 인간 관찰 보고서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외계 존재의 시선을 통해 인간의 행동과 욕망을 낯설게 바라보는 방식, 이것이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핵심 장치가 있습니다. 바로 검은 액체로 가득 찬 공간입니다. 유인된 남성들은 이 공간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몸은 텅 빈 껍질처럼 변합니다. 이 장면에서 사용된 것이 바디 호러(body horror) 문법입니다. 바디 호러란 신체의 변형, 해체, 이질화를 공포의 수단으로 삼는 장르적 문법으로, 단순한 시각적 자극을 넘어 존재의 경계가 흐려지는 불안감을 자아냅니다. 저는 그 설명되지 않는 공포가 대사로 설명되는 공포보다 훨씬 강하게 남았습니다.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은 영화 내내 설명을 거부합니다. 이것을 영화 이론에서는 엘립시스(ellipsis), 즉 의도적 생략이라고 부릅니다. 엘립시스란 서사에서 특정 정보를 일부러 빠뜨림으로써 관객 스스로 빈 공간을 채우게 만드는 내러티브 기법입니다. 왜 그녀가 인간을 사냥하는지,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위해 그러는지 영화는 끝까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빈 공간 덕분에 영화가 끝난 뒤에도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실제로 관람 후 사흘 동안 관련 해석 글을 찾아보며 머릿속에서 영화를 다시 돌렸습니다.
영화의 전환점은 얼굴이 심하게 변형된 남성이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세상에서 끊임없이 외면당하던 그 남성을 만나면서 주인공은 처음으로 인간의 외로움에 반응합니다. 그 장면이 슬프게 느껴진 이유는, 가장 인간답지 않은 존재가 오히려 가장 인간적인 감정을 처음으로 배우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가 어떤 관객에게 맞는지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블레이드 러너 2049》, 《애니힐레이션》처럼 설명보다 분위기로 밀고 가는 SF를 즐기는 관객
- 인간 존재와 욕망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 담긴 영화를 찾는 관객
- 빠른 전개보다 영상미와 음악이 만드는 감각적 경험을 선호하는 관객
- 반대로, 명확한 플롯과 설명을 원하는 관객에게는 상당히 고역일 수 있습니다
미카 레비 OST와 스코틀랜드 영상미가 만드는 감각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도 음악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미카 레비가 작곡한 이 영화의 OST는 일반적인 영화 음악과 결이 완전히 다릅니다.
이 OST는 마이크로토널리티(microtonality) 기법을 적극 활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이크로토널리티란 서양 음악의 표준 반음 체계를 벗어난 미세한 음 간격을 사용하는 작곡 기법으로, 듣는 사람이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면서도 불안감이나 이질감을 유발합니다. 음악만 듣고 있어도 "이건 인간의 음악이 아니다"라는 느낌이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직접 들어보니, 이 음악은 배경음악이 아니라 영화 자체의 감정처럼 기능했습니다.
미카 레비는 이 OST로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BAFTA)에서 영화 음악상을 수상했습니다(출처: BAFTA 공식 사이트). 그만큼 이 음악이 영화의 분위기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공식적으로 받은 셈입니다.
영상미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스코틀랜드는 흐린 하늘과 안개 낀 도로, 황량한 해안이 특징입니다. 영화는 이 지형을 단순한 배경으로 쓰지 않고 감정의 연장선으로 활용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러티브 공간(narrative space) 개념입니다. 내러티브 공간이란 배경 자체가 이야기의 감정이나 주제를 직접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영화적 장치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쓸쓸한 해안 도로를 달리는 장면들은 주인공의 고립감과 이질감을 말없이 표현합니다.
영화 비평계에서도 이 작품의 영상 언어에 대한 평가는 일관됩니다. 로저 에버트 재단이 운영하는 RogerEbert.com은 이 영화를 "인간 존재를 가장 낯설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포착한 작품"으로 평가했습니다(출처: RogerEbert.com).
결국 《Under the Skin》을 보고 나서 제가 계속 붙잡고 있던 질문은 하나였습니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인간의 감정을 배워가는 과정을 보면서, 오히려 저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되돌아보게 됐습니다. 불타는 몸을 바라보던 마지막 장면은, 그 어떤 설명보다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철학적 SF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반드시 한 번은 경험해볼 만한 작품입니다. 다만 빠른 전개를 원한다면 솔직히 어렵습니다. 분위기에 몸을 맡기고 들어갈 준비가 된 분께만 권합니다.
참고: Netflix, ChatGPT, BAFTA 공식 사이트(https://www.bafta.org), RogerEbert.com(https://www.rogerebe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