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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메리아' (독창성, 영상미, 관람포인트)

by 조아가자 2026. 4. 26.

느린 영화가 지루하다고 생각하셨습니까?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로메리아》를 보고 난후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의 안개 낀 해안과 순례 축제를 배경으로, 한 여성이 가족의 기억을 찾아가는 이 영화는 느린 것이 오히려 무기가 되는 영화작품입니다.

독창성: 기억을 설명하지 않고 느끼게 만드는 방식

일반적으로 가족의 비밀을 파헤치는 영화라고 하면 반전과 폭로가 중심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런 방식을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로메리아》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영화는 플래시백(flashback), 즉 과거 장면을 직접 보여주는 연출을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플래시백이란 현재 시제의 서사 흐름을 끊고 과거 장면을 삽입하는 영화적 기법을 말합니다. 그 대신 이 영화는 낡은 사진 한 장, 바람 소리, 오래된 노래 한 소절로 과거를 암시합니다. 저는 이 방식이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보다 보니 오히려 더 실제 기억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도 부모님의 젊은 시절을 직접 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건 엘리프시스(ellipsis) 방식의 서사 구조입니다. 엘리프시스란 이야기 사이의 공백을 의도적으로 남겨두는 서술 방식으로, 관객이 그 빈틈을 스스로 채우도록 유도합니다. 마리나는 부모의 친구들을 만나 조각난 이야기를 들을 뿐, 완전한 진실에는 끝내 도달하지 못합니다. 저는 이 부분이 굉장히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실제 가족의 역사도 결코 완벽하게 복원되지는 않으니까요.

이 영화가 갈리시아 지방의 구술사(oral history) 기록 프로젝트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도 이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구술사란 문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기억과 증언을 수집하고 기록하는 역사 방법론입니다. 기록되지 않은 것들, 불완전한 것들을 소재로 삼았기 때문에 영화 역시 그 불완전함을 그대로 품고 있습니다.

 

로메리아

영상미: 풍경이 감정을 대신 말하는 순간들

이 영화에서 갈리시아의 풍경은 단순한 로케이션이 아닙니다. 저는 보는 내내 "이 바다가 마리나의 내면 그 자체구나"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영화는 미장센(mise-en-scène) 연출을 굉장히 섬세하게 활용합니다. 미장센이란 프레임 안에 담기는 배우의 위치, 조명, 소품, 배경 등 시각적 요소 전체를 설계하는 연출 방식을 의미합니다. 비 오는 해안에서 마리나가 혼자 서 있는 장면, 안개 속 순례길을 걷는 장면 모두 대사 없이도 그녀의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합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이렇게 말 없이도 감정이 전달될 수 있다는 걸 오랜만에 실감했습니다.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리시아 전통 음악은 가이타(gaita)라는 백파이프 계열 악기를 중심으로 구성됩니다. 가이타는 켈트 문화권에서 유래한 관악기로, 갈리시아 지역 특유의 쓸쓸하고 서정적인 음색을 만들어내는 전통 악기입니다. 이 소리가 영화 전반에 낮게 깔리다가 후반부 로메리아 축제 장면에서 터져 나오는 순간, 저는 실제로 눈물이 날 뻔했습니다. 제가 직접 봤는데, 그 장면만큼은 OST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음악 자체가 감정이 되는 경험이었습니다.

갈리시아 지방은 스페인 북서부에 위치하며,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의 종착지로 알려진 곳입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 순례길은 단순한 종교 여행을 넘어 자기 성찰의 여정으로 전 세계 수십만 명이 매년 걷는 문화적 경로입니다(출처: UNESCO 세계유산). 영화가 이 공간을 택한 이유가 있습니다. 걷는 행위 자체가 내면을 들여다보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관람 포인트: 이 영화, 어떻게 봐야 제대로 느껴지는가

솔직히 《로메리아》는 아무 때나 보면 별로일 수도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분명히 보는 환경이 중요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가장 잘 즐기려면 다음 세 가지를 권합니다.

  • 밤에 조용한 환경에서 혼자 볼 것. 낮보다 밤에 감정이 훨씬 더 깊게 스며듭니다.
  • 자막을 꼼꼼히 따라가기보다 장면의 분위기를 함께 흡수할 것. 대사보다 침묵이 더 많은 영화입니다.
  • 서사적 완결을 기대하지 말 것. 이 영화는 답을 주는 영화가 아니라 질문을 남기는 영화입니다.

《Call Me by Your Name》이나 《Past Lives》처럼 잔잔한 유럽 감성 영화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훨씬 크게 공감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면 《인셉션》이나 《매드 맥스》 같은 빠른 전개의 영화를 선호하는 분이라면 다소 힘겹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호불호가 강하게 갈리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해외 평론계에서는 이 작품을 "나레이티브 시네마(narrative cinema)의 전통을 넘어선 감각적 영화"로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나레이티브 시네마란 명확한 이야기 구조와 인과관계로 관객을 이끌어가는 방식의 영화를 말하는데, 《로메리아》는 그 공식을 의도적으로 벗어납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2023년 국내 예술영화 관객 현황에 따르면, 국내 예술영화 누적 관객 중 40대 이상이 60%를 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이 데이터를 보면 《로메리아》 같은 작품이 국내에서 어떤 관객층에게 닿을지 어느 정도 가늠이 됩니다.

《로메리아》는 보고 나서 바로 잊히는 영화가 아닙니다. 저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갈리시아 해안의 그 안개가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느린 영화를 꺼리는 분이라도 한 번쯤은 도전해 볼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가족의 기억이나 뿌리에 대해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적 있는 분이라면, 이 영화가 건네는 질문이 꽤 오래 남을 것입니다.


참고: 직접 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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