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의 34번째 장편 《그녀가 돌아온 날》은 2026년 5월 국내 개봉과 동시에 예술영화 팬들 사이에서 조용하지만 강하게 화제가 됐습니다. 저는 솔직히 "또 홍상수식 대화 영화겠지" 하는 마음으로 극장에 들어갔는데, 나오면서는 꽤 오래 말을 잃었습니다. 기억, 정체성, 그리고 자기 자신을 연기한다는 것의 의미를 이 영화만큼 서늘하게 건드린 영화 작품을 최근에 본 기억이 없었습니다.

반복구조가 만들어내는 감정의 균열
홍상수 감독 영화를 몇 편 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이 감독은 반복이라는 장치를 즐겨 씁니다. 그런데 《그녀가 돌아온 날》에서의 반복은 이전 작품들보다 훨씬 더 의도적이고 날카롭게 느껴졌습니다.
영화는 복귀작 개봉을 앞둔 중년 배우 '정아'가 하루 동안 세 번의 인터뷰를 치르는 과정을 따라갑니다. 인터뷰어가 던지는 질문은 거의 같습니다. 그런데 정아의 대답은 조금씩 달라집니다. 이 지점이 저는 영화 전체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반복 구조는 지루함을 유발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이 영화에서는 정반대로 작동했습니다. 반복될수록 오히려 긴장감이 쌓였습니다. 같은 기억인데도 상황과 감정에 따라 다르게 재구성되는 정아의 말들이 굉장히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영화 연출 측면에서 주목할 부분은 롱테이크(Long Take)의 활용입니다. 롱테이크란 편집 없이 카메라를 장시간 연속으로 돌리는 촬영 기법으로, 인물의 감정 변화를 실시간으로 담아내는 효과가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홍상수 감독 특유의 줌인(Zoom-in) 기법이 더해집니다. 줌인이란 카메라 렌즈를 조정해 피사체를 점점 크게 당겨 찍는 방식으로, 인물 내면에 갑작스럽게 파고드는 느낌을 줍니다. 저는 이 두 기법이 결합될 때마다 정아의 얼굴에서 뭔가를 들킨 것 같은 불편함이 느껴졌습니다. 그 불편함이 싫지 않았습니다.
영화가 반복을 통해 던지는 질문은 결국 이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정말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는가. 저는 이 질문이 극장을 나온 뒤에도 한참 따라다녔습니다.
기억과 연기 사이, 정아라는 인물
이 영화에서 배우라는 존재를 다루는 방식이 굉장히 독특합니다. 일반적으로 '배우 이야기'를 다룬 영화는 무대 위 연기와 일상의 자아를 대비시키는 방식을 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돌아온 날》은 그 구분 자체를 흐트러뜨립니다.
중반부 연기 수업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연기 선생이 정아에게 "오늘 인터뷰 장면을 다시 연기해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인터뷰에서는 자연스럽게 말했던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저는 이 장면이 굉장히 슬프게 느껴졌습니다. 진심으로 표현했던 감정은 그 순간이 지나면 이미 다른 것이 되어 있다는 걸, 영화가 말이 아니라 장면으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영화는 이 아이러니를 통해 자기 서사화(Self-Narrativization)라는 개념을 건드립니다. 자기 서사화란 인간이 자신의 경험을 기억하고 타인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심리적 현상을 의미합니다. 정아는 인터뷰에서 '솔직하게'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매 순간 자신을 조금씩 다르게 연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비단 배우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기억은 녹화된 영상처럼 고정된 것이 아니라, 매번 인출할 때마다 재구성되는 구성물에 가깝습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APA)). 정아가 같은 기억을 매번 다르게 말하는 것은 그래서 결함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 자체입니다. 영화는 그 조건을 카메라 앞에 가만히 세워둡니다.
흑백 화면도 이 주제와 정확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흑백 영상은 단순히 예술영화의 미학적 선택이 아니라, 미장센(Mise-en-scène) 차원에서 기억과 현실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 요소, 즉 조명, 배경, 인물의 위치와 움직임을 통해 감정과 의미를 전달하는 영화 연출 방식입니다. 특히 밤거리 장면들은 흑백 조명 아래에서 굉장히 아름다웠고, 동시에 굉장히 쓸쓸했습니다.
송선미의 연기, 그리고 이 영화를 봐야 할 이유
솔직히 말하면, 이 영화에서 송선미 배우의 연기가 없었다면 이만큼의 여운이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영화는 거의 그녀 혼자 끌고 갑니다.
화려한 감정 폭발이 없습니다. 대사를 크게 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눈빛 하나, 말을 잃는 순간 하나에서 불안과 외로움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인터뷰 도중 갑자기 말을 잃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장면은 제가 극장에서 실제로 숨을 참았습니다. 이런 연기는 기술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실감했습니다.
제76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서 처음 공개됐을 때, 해외 평단에서도 송선미 배우의 퍼포먼스에 대한 호평이 특히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베를린 국제영화제(Berlinale)는 칸, 베니스와 함께 세계 3대 영화제로 꼽히는 권위 있는 행사로, 파노라마 부문은 다양성과 실험성을 갖춘 작품들을 소개하는 섹션입니다. 그 자리에서 "기억과 정체성의 불안정성을 섬세하게 탐구한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는 점은, 단순한 국내 예술영화가 아닌 보편적 이야기로 읽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출처: 베를린 국제영화제 공식 사이트).
이 영화를 보기 전 확인하면 좋을 관전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세 번의 인터뷰에서 정아의 대답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집중해서 보기
- 롱테이크와 줌인이 언제 등장하는지 카메라 움직임을 의식하며 보기
- 음악 대신 채워지는 숨소리, 거리 소음, 술잔 소리 등 사운드 디자인에 귀 기울이기
마지막으로 분명히 말씀드리면, 이 영화는 확실히 호불호가 갈립니다. 전개가 느리고, 명확한 결말이 없으며, 설명도 거의 없습니다. 빠른 전개와 시원한 결말을 원하신다면 다소 답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애매함 자체가 이 영화의 정직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정아는 아무 말 없이 밤거리를 바라봅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그 침묵이 한동안 귓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사람은 결국 자기 기억 안에서도 계속 자신을 연기한다"는 생각이 든 건 그날 밤이 처음이 아닌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생각이 훨씬 더 선명해졌습니다. 홍상수 감독 영화에 입문하려는 분이라면 이 작품부터 시작하셔도 좋고, 이미 팬이시라면 반드시 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직접 관람, CHATGPT